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아폰수 1세]] ====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레온 국왕 [[알폰소 7세]]는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 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의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아폰수는 귀도 데 비코에게 [[라틴어]]로 적힌 서신을 전달해 교황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서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성 [[베드로]]의 기사라고 선언하고 포르투갈 왕국을 [[교황청]]에 봉헌하겠으며, 매년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고 레콩키스타를 이행할 테니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1146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3세]]의 딸 마틸드(마팔다)[* [[프랑스어]] 이름은 '마틸드(Mathilde)', [[포르투갈어]] 이름은 '마팔다(Mafalda)'이다.]와 결혼해, [[십자군 원정]]에 적극적이었던 아메데오 3세의 지원을 받고자 노력했다. 1147년, 아폰수는 코임브라에서 250명의 최정예 병사들과 함께 비밀리에 출진해 코임브라 인근의 무슬림 도시인 산타렘을 기습 공격해 단숨에 공략했다. 이리하여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대한 무슬림군의 끊임없는 습격을 가능케 했던 무슬림들의 거점이 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그는 여세를 이어가 [[리스본]]을 포위하기 위해 타구스 강 북쪽의 무슬림 거점인 사카벰으로 진군해 무슬림들을 또다시 격파했다. 이후 리스본을 포위한 포르투갈군은 때마침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 원정에 착수해 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잉글랜드군과 연합해 리스본을 몇 달간 포위 공격한 끝에 그해 10월 20일에 공략에 성공했다. 일부 십자군은 성지로의 여행을 계속했지만, 대부분은 새로 점령된 리스본에 정착했다. 아폰수는 십자군의 일원인 헤이스팅스의 길버트를 리스본의 주교로 선출했다. 그 후 아폰수는 정복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농업진흥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새로 정복한 지역에 정착할 이주민들을 모집했고, 지방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면서도 그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세금 수취 및 재정 관리를 위해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는데, 특히 야히야 벤 야히야는 포르투갈 왕국 세무장관으로 선임되어 왕국의 재정을 책임졌다. 이후 포르투갈 왕국은 재정을 유대인에게 맡기고 유대인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1160년, 아폰수는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 여왕 [[페트로닐라]]의 남편으로서 아라곤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산타 마리아 델 팔로에서 만나서 자신의 딸 마팔다와 아라곤 왕자 [[알폰소 2세(아라곤)|알폰소 2세]]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1162년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사망한 뒤, 페트로닐라는 마음을 돌려 아들 알폰소 2세를 레온 공주 산차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1165년, 레온 왕국의 새 국왕 [[페르난두 2세(레온)|페르난두 2세]]는 아폰수의 딸 우라카와 결혼하고 평화협약을 맺음으로써 선대 때부터 이어졌던 양국의 갈등을 종식하려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라데스마와 사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거주시키고 총독을 선임했다. 그러나 아폰수는 자국의 국경 인근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는 것은 장차 그곳을 요새화해 포르투갈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그는 그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166년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산슈 1세는 곧바로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1168년, 페르난두 2세는 갈리시아로 출진해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포위 공격하던 포르투갈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아폰수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갈리시아를 침공해 투이 등 여러 성채를 공략하고 1169년에는 카세레스 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바꿔 일부 병력을 갈리시아에 남겨두고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바다호스 공략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군의 전력이 분산되자, 페르난두 2세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끌어모아 갈리시아에 침투한 포르투갈군을 격파한 뒤 바다호스 공방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아폰수를 습격했다. 아폰수는 급히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진 채 사로잡혔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바다호스를 마저 공략한 뒤 레온 왕국의 봉신 노릇을 하는 무슬림들에게 바다호스 성채를 맡겼다. 1070년, 페르난두 2세는 장인 아폰수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지난날 아폰수 1세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받고 카세레스, 바다호스, 트루히요,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 몬탄체스 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중 트루히요, 몬탄체스, 산타 크루즈 데 라 시에라 등지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의 영지가 되었다. 이렇게 풀려난 아폰수는 다리가 부러진 중상을 입은 여파로 건강이 약해져서 국정을 돌보기 어렵게 되자 아들 [[산슈 1세]]와 딸 테레사에게 섭정을 맡겼다. 1174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시골 지역에서 요양했고, 산슈는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 활동을 담당하고 테레사는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그 해에 산슈 1세와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의 누이인 돌세가 결혼하면서, 포르투갈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다. 1178년, 산슈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카스티야 방면으로 진군해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를 공격한 틈을 타 갈리시아를 공격하여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세비야]]와 [[과달키비르 강]] 인근에서 [[무와히드 왕조]]를 공격해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교령 <명백히 입증하는(Manifestis Probatum)>을 포르투갈 궁정에 보냈다. 그는 이 교령에서 아폰수 1세를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하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교도들을 온전히 꺾을 때까지 끝까지 싸워달라고 당부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교황청의 공인을 얻은 유럽의 왕국들 중 하나가 되었다. 산슈 1세와 테레사 남매의 통치는 1184년 플랑드르 백작 필립이 테레사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버지와 산슈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낸 테레사는 왕국을 떠나기 전에 산슈에게 모든 국정을 맡겼다. 테레사가 떠난 지 몇 달 후,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유수프 1세]]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을 침공해 아폰수가 머물고 있던 산타렝을 포위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몸소 성벽 위를 거닐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포르투갈군은 이에 용기를 얻어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해 6월 산티아고 기사단이 출격해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유수프 1세가 철수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위기를 모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